1954년에는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에 참가, 유럽 현대작곡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케이지는 피아노에 다양한 프레퍼레이션을 줄 수 있는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고안해 내 그 이후로는 많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활용한 작품을 썼다.
작곡을 하면서 불확정적 요소의 도입, 도형악보의 창안, 콘택트 마이크나 스피커를 이용한 음악세계의 확대 등을 독창성에 넘친 새로운 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케이지는 1945∼46년에 키타 사라브하이로부터 동양 철학을, 일본의 스즈키로부터 선을 배움으로써 동양 사상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경향은 타악기의 앙상블이나 프리페어드 피아노에 의한 음악의 창시자로서 음악을 악음의 세계에서 해방하고 조음을 포함한 다채로운 음색에 의한 작품과 리듬 구성법에 의한 작품을 쓴 작가로 알려져 왔다.
또한, 1950년대에 불확정성 음악을 확립하고서, 근대 유럽적 음악에 대한 생각과 결별하고 찬스 오퍼레이션에 의하여 작곡가의 의지나 음의 선택이 될 수 있는 대로 개입되지 않는 방법을 씀으로써 인간 중심의 미의식과는 다른 새로운 예술의 개념을 탄생시킨 작곡가로서 유명하다.
케이지가 ‘우연’을 음악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였다.
우연을 자연의 근원적인 원리로 인식한 그는 예술가들의 작위적인 이기심을 경멸했으며 예술과 우리들이 매일매일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사이에 구별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말은 사람들에게 역설처럼 들렸다.
케이지는 음악이란 소리예술이므로 어떠한 소리도 음악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에 사람들이 음악으로 간주하지 않던 소리들을 과감하게 재료로 사용했다.
이는 비 미학적 물질을 사용하여 예술품을 제작함으로써 전통미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던 뒤샹의 행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소리에는 네 가지 요소들, 즉 음의 고저, 음색, 큰 소리, 지속이 있으며 오히려 정적이 유일한 지속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4분 33초〉는 단지 지속만이 있는 작품이다.
오늘날 우연성이나 불확실성은 작곡기법의 하나로서 널리 채용되고 있다.
우연성의 음악은 모턴 펠드먼, 얼 브라운 등 미국 새 세대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1954년 10월에 열린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케이지의 음악과 사상이 소개되어 P.불레즈, 카를하인즈 슈토크하우젠 등의 작곡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60년대부터 우연성의 사상은 기보법 개량이나 연주행위를 회복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서양의 음악사유 자체의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연주 도중에 연주자의 행위가 들어가도 하기 때문에 음악이 아닌 해프닝으로 보기도 한다.
케이지의 영향은 독일에서 벌어진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의 해프닝에도 미쳤는데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대부분 케이지의 제자들이었다. 음악은 소리예술이므로 음식을 씹어 먹는 소리나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도 악기 소리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플럭서스 그룹의 생각은 주변의 소리들을 콜라주하는 케이지의 작곡방법과 다르지 않았다.
우연을 자연적인 형태의 원리로 인식한 그는 예술가들이 형태를 이성적으로 창조하는 것에 반발했고 예술품에서 클라이막스와 단계가 나타나는 것을 배척해 반복을 선호했다.
그는 예술과 인생 사이의 간격을 없애버리기 위해 예술가 자신을 배제하는 방법에 도달했는데 여기에는 자아와 타아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선불교의 방법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알았다.
연이은 ‘해프닝’과 퍼포먼스로 ‘스타’가 된 케이지는 1954년 한 강연에서 “당신 자신 속에 주위의 에테르의 카오스와 유사한 것을 가꾸어라: 마음을 해방하고, 정신을 자유롭게 하라”라는 말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테이프를 이용한 전자음향의 실험을 전개하면서 그의 음악은 하나의 거대한 사조를 이루기 시작한다.
비결정성,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가 그의 예술과 사상을 지칭하기 위해 동원되었고, 그는 ‘컬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최소의 것이 최대의 효과를 낳는다.”라는 명제는 순수음악계와 대중음악계를 막론하고 ‘아방가르드’이고자 하는 모든 뮤지션들의 정언명령이 되었다. 또한 소음을 포함하여 ‘비음악적 소리’를 음악에 ‘무작위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 역시 케이지에 의해 봇물이 터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케이지에 의해 최초로 시도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선구자들인 에드가 바레즈, 피에르 샤페르 등의 영향력이 순수음악계에 그친 반면, 케이지는 대중음악계를 변화시키는 데에도 무시 못 할 깊은 파장을 미쳤다.
라 몽트 영, 테디 릴리,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 등은 케이지의 아이디어와 테크닉을 더욱 발전시켜 미니멀리즘 유파를 만들어냈고,
이들 중 라 몽트 영은 존 케일을 통해 1967년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낳았으며, 테디 릴리는 이르민 슈미트를 통해 1971년 캔을 낳았다.
현 시점에서 케이지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는 ‘정형화’해 있다. 이는 고전음악을 포함한 서양음악 전통의 부정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조성으로 대표되는 수직적 원리에 기초한 작곡 방법을 부정했다든가, 음의 고저 사이의 정확한 간격을 부정했다든가, 전자 장비를 포함한 각종 비악기 적 도구를 사용하여 악기에 관한 전통적 개념을 부정했다든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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